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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코바르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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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부코바르 전투는 1991년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중 크로아티아 동부의 부코바르에서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과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크로아티아 방위군을 상대로 벌인 전투이다. 부코바르는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이 혼재된 지역으로, 유고슬라비아 해체 과정에서 민족 간 갈등이 심화되어 전투로 이어졌다. 유고 인민군은 부코바르를 포위하고 대규모 포격을 가했으며, 세르비아계 민병대는 민간인을 학살하는 등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전투는 1991년 11월 부코바르의 함락으로 끝났으며, 부코바르는 도시 전체가 파괴되고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후 국제형사재판소(ICTY)는 전쟁 범죄 혐의로 여러 인물을 기소했고, 부코바르는 크로아티아의 저항과 고통의 상징이 되었다. 현재 부코바르는 재건되었으며, 전쟁의 상처를 기억하기 위한 기념관과 추모 시설이 조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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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코바르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 이름부코바르 전투
전체 전쟁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포탄 구멍이 심하게 뚫린 벽돌과 콘크리트 탑
2010년의 부코바르 급수탑. 전투 중 심하게 파손되었으며, 분쟁의 상징으로 보존되어 있다.
날짜1991년 8월 25일 - 11월 18일 (87일)
장소크로아티아 부코바르
결과세르비아군의 피로스의 승리
교전국 1
SAO 동슬라보니아, 바라냐 및 서시르미아
지휘관
지휘관 1알렉산다르 스피르코브스키 (~ 1991년 9월)
지보타 파니치 (1991년 9월 ~)
밀레 므르크시치
베셀린 슐리반차닌
믈라덴 브라니치
안드리야 비오체비치
고란 하지치
젤코 라주나토비치
보이슬라브 셰셸
지휘관 2블라고 자드로
밀레 데다코비치
브란코 보르코비치
마르코 바비치
안톤 투스
로베르트 실리치
병력 규모
병력 1약 36,000명
병력 2약 1,800명
사상자
사상자 11,103명 사망, 2,500명 부상, 전차 및 장갑차 110대 손실, 항공기 3대 격추
사상자 2크로아티아의 공식 입장: 1,649명 사상 (879명 사망, 770명 부상)
민간인 사상자민간인 1,131명 사망 (부코바르 학살 제외)
전역
전역 구분동슬라보니아
기타 정보

2. 배경

1917년, 다뉴브 강에서 내려다 본 부코바르의 전경.


부코바르는 크로아티아 동부 국경인 다뉴브강 서안 동부 슬라보니아의 중심지였다. 이 지역은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헝가리인, 슬로바키아인, 루테니아인 등 여러 민족이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이전까지 조화롭게 살아가던 곳이었다. 전쟁 이전에는 유고슬라비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였으며,[234] 부코바르의 오랜 번영은 크로아티아 최고의 바로크 건축 양식의 건물들이 모여 있다는 것에서 드러났다.[23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 지역은 독일인이 추방되고 유고슬라비아 내 다른 곳에서 살던 민족들이 들어오면서 큰 변화를 겪었다.[236] 1991년 유고슬라비아 마지막 인구 조사에서 부코바르 지역 주민은 84,189명이었으며, 이 중 43.8%가 크로아티아계, 37.5%가 세르비아계, 나머지는 기타 민족이었다. 부코바르 도시 내에서는 크로아티아계가 47%, 세르비아계가 32.3%였다.[237]

1945년 이후 유고슬라비아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 통치 하에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 6개 공화국이 연합한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었다.[238] 현대 세르비아-크로아티아 국경은 1945년 유고슬라비아 연방 정부 위원회가 세르비아계 다수 지역을 세르비아 공화국으로, 크로아티아계 다수 지역을 크로아티아 공화국으로 편입하면서 만들어졌으나, 많은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다른 공화국에 남게 되었다.[239]

1980년 티토가 사망하면서 억압되었던 민족주의가 대두되고 각 공화국은 연방 정부의 권위가 약화되자 더 많은 권한을 요구했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다당제 민주주의 및 경제 개혁을 단행했으나, 세르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개혁에 반대하며 유고슬라비아 정부를 강화하려 했다.[240] 1990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에서 선거가 열려 공산당 통치가 끝나고 독립 옹호 민족주의 정당이 집권했다. 크로아티아에서는 크로아티아 민주연합(HDZ)의 프라뇨 투지만이 집권했다.[241]

투지만 정부에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민족들은 반발했다.[241]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 민주당(SDS)은 밀로셰비치를 지지하며 HDZ는 우스타샤의 부활이라고 비난했다.[242] 1990년 중반 이후 세르비아 민주당은 세르비아계 거주 지역에서 무장 반란을 일으키고 세르비아 정부 및 준군사의 지원을 받아 크라이나 세르비아인 자치주(SAO 크라이나)를 선포했다. 크로아티아는 대부분 지역에서 영토 통제를 상실했다.[242] 1991년 2월 크라이나 세르비아인 자치주는 크로아티아에서 독립, 세르비아와 통합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기타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지역도 분리 독립을 발표하고 민병대를 조직했다.[243]

2. 1. 지정학적, 역사적 배경



부코바르는 크로아티아 동부 국경의 다뉴브강 서안, 동부 슬라보니아 지역의 주요 중심지였다. 이 지역은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헝가리인, 슬로바키아인, 루신인 등 다양한 민족들이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이전까지 비교적 조화롭게 함께 살아가던 곳이었다. 전쟁 이전에는 유고슬라비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였으며,[8] 오랜 번영은 크로아티아 최고의 바로크 건축 양식의 건물들이 모여 있는 것에서 드러났다.[9]

이 지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인이 추방되고 유고슬라비아 내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정착하면서 인구 구성에 큰 변화를 겪었다.[10] 1991년 유고슬라비아의 마지막 인구 조사에 따르면, 부코바르 주변 지역을 포함한 부코바르 지역 주민은 84,189명이었으며, 이 중 43.8%가 크로아티아계, 37.5%가 세르비아계, 나머지는 다른 민족들이었다. 부코바르 도시 내에서는 크로아티아계가 47%, 세르비아계가 32.3%였다.[11]

1945년 이후 유고슬라비아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 통치 하에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 6개 공화국이 연합한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었다.[12] 현대 세르비아-크로아티아 국경은 1945년 유고슬라비아 연방 정부 위원회가 세르비아계 다수 지역을 세르비아 공화국으로, 크로아티아계 다수 지역을 크로아티아 공화국으로 편입하면서 만들어졌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많은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다른 공화국에 남게 되었다.[13]

1980년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사망하면서 오랫동안 억압되어 있던 민족주의가 다시 나타나기 시작했고, 각 공화국은 연방 정부의 권위가 약화되면서 더 많은 권한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다당제 민주주의 및 경제 개혁을 추진했으나, 세르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개혁에 반대하며 유고슬라비아 정부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14] 1990년에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선거를 통해 공산당 통치를 종식시키고, 양국에 독립을 지지하는 민족주의 정당이 집권했다. 크로아티아에서는 프라뇨 투지만의 크로아티아 민주 연합(HDZ)이 정권을 잡았고, 투지만이 대통령이 되었다.[15]

투지만 정부의 정책은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주민들의 반발을 샀다. 밀로셰비치의 지원을 받은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 민주당(SDS)은 HDZ를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수십만 명의 세르비아인을 학살한 민족주의 파시즘 우스타샤 운동의 부활이라고 비난했다.[16] 1990년 중반 이후 세르비아 민주당은 세르비아계 거주 지역에서 무장 반란을 일으키고, 세르비아 정부 및 세르비아 준군사 조직의 지원을 받아 크라이나 세르비아 자치주의 독립을 선포했다. 크로아티아는 공화국 내 대부분 지역에서 영토 통제력을 빠르게 상실했다.[16] 1991년 2월에는 크라이나 세르비아인 자치주가 크로아티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세르비아와 통합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크로아티아 내 다른 세르비아계 지역도 분리 독립을 발표하고 민병대를 조직하기 시작했다.[17]

2. 2.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발발

1980년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사망하면서 오랫동안 억압되었던 민족주의가 부활했고, 연방 정부가 약화되면서 각 공화국은 더 많은 권한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는 다당제 민주주의와 경제 개혁을 추진했으나, 세르비아의 권위주의적 공산주의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개혁에 반대하며 유고슬라비아 정부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240] 1990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공산주의 통치를 종식시키고 양국에 친독립 민족주의 정당을 집권시킨 선거를 치렀다. 크로아티아에서는 프라뇨 투지만의 크로아티아 민주 연합(HDZ)이 권력을 잡았고, 투지만이 대통령이 되었다.[241]

투지만 정부가 들어서자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소수민족들은 반발하기 시작하였다.[241] 밀로셰비치의 지원을 받은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 민주당(SDS)은 HDZ를 제2차 세계 대전 중 수십만 명의 세르비아인을 학살한 민족주의 파시즘 우스타샤 운동의 부활이라고 비난했다.[242] 1990년 중반부터 SDS는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 거주 지역에서 무장 반란을 일으키고 세르비아 정부와 세르비아 준군사 조직의 지원을 받아 자칭 크라이나 세르비아 자치주(SAO 크라이나)를 설립했다. 크로아티아 정부는 공화국의 광대한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빠르게 잃었다.[242] 1991년 2월, 크라이나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세르비아와 통합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크로아티아의 다른 세르비아 공동체들도 분리될 것이라고 발표하고 자체 민병대를 설립했다.[243]

2. 3. 동슬라보니아 지역의 긴장 고조

1991년 크로아티아 독립 국민투표를 전후하여 1991년 초, 부코바르와 그 주변 지역에서는 세르비아계 준군사조직의 활동이 증가하며 긴장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1991년 4월 1일, 부코바르와 동슬라보니아의 여러 마을 주변에서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주요 도로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기 시작했다.[18] 보이슬라브 셰셸이 이끄는 세르비아계 준군사조직인 백색 독수리단은 부코바르 바로 북쪽에 있는 세르비아계 마을인 보로보 셀로로 이동했다.[19] 4월 중순에는 보로보 셀로 외곽에서 세르비아군 진지에 Armbrust 휴대용 무반동총 3발을 발사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당시 국방부 차관이었던 고이코 슈샤크가 공격을 지휘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20] 이 공격으로 인한 사상자는 없었지만, 민족 간 긴장은 더욱 심화되었다.[21]

1991년 5월 2일, 보로보셀로 전투가 발발하여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보로보 셀로 중심부에 있던 크로아티아 경찰 버스 2대를 공격, 경찰관 12명이 사망하고 22명이 부상을 입었다. 세르비아 민병대원 1명도 사망했다.[18][22] 이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 사이에 벌어진 최악의 폭력 사태로 기록되었다.[23] 이 사건으로 인해 슬라보니아 전역에서 민족 간 폭력이 급증했다.[24]

세르비아 민병대가 1991년 동 슬라보니아의 에르두트에서 순찰하는 모습


얼마 지나지 않아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 부대가 보로보 셀로로 이동했다. 유고 인민군의 개입은 표면적으로는 중립을 표방했지만, 크로아티아 내무부 차관 밀란 브레작은 유고 인민군이 크로아티아 경찰의 민병대 진압을 방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25][26]

3. 전투 서곡

1991년 초, 세르비아크로아티아의 분쟁은 동슬라보니아로 확대되었다. 4월 1일, 부코바르 및 동슬라보니아의 여러 마을을 장악한 세르비아계 주민들은 주요 도로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기 시작했다.[244] 보이슬라브 셰셸이 이끄는 세르비아계 준군사조직인 흰 독수리는 부코바르 바로 북쪽에 있는 세르비아계 마을인 보로보셀로로 이동했다.[245]

1991년 4월 중순, 보로보 셀로 외곽에서 세르비아계 병사를 향해 암브러스트(Armbrust) 대전차유도탄 3기를 발사하는 기습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당시 국방부 차관이었던 고이코 슈샤크가 공격을 지시한 것이었다.[246] 이 공격으로 사상자는 없었으나 민족 사이의 긴장을 심화시켰다.[246] 5월 2일에는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보로보 셀로 중심에 있던 크로아티아 경찰 버스 2대를 공격하여 경찰관 12명이 사망하고 22명이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때 세르비아인 3명도 사망하였다.[244] 보로보셀로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세르비아-크로아티아 사이 충돌 중 가장 폭력적인 사태로 기록되었다.[247] 이 전투로 동부 슬라보니아에서 크로아티아인이 대규모로 슬라보니아 전역에서 인종간 폭력 사태가 심화되었다.[248]

얼마 지나지 않아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이 보로보 셀로로 이동했다. 군의 개입은 크로아티아 지도자에게 환영받았으나, 크로아티아 내무부 차관인 밀란 브레자크는 인민군이 크로아티아 경찰이 민병대를 진압하는 것을 막고 있다고 말했다.[249][250] 민병대 사이의 총격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248] 부코바르에서는 크로아티아인이 세르비아 주민들을 위협했으며 때로는 폭력 사태로 빚어지기도 했다. 크로아티아 경찰은 지역 라디오 방송국인 '라디오 부코바르'를 강제로 점거하여 인종차별적 발언을 퍼뜨리던 세르비아계 직원을 쫓아내고 크로아티아계로 채웠다.[251] 세르비아계 민병대는 부코바르 주변 세르비아계 다수 마을에서 부코바르로 향하는 도로를 막기 시작하였고, 부코바르로 향하는 도로는 크로아티아계 마을을 지나는 비포장 도로 몇 개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부코바르의 상황은 "살인적인" 분위기가 되었다.[252]

1991년 5월 19일, 크로아티아 정부는 크로아티아 독립을 묻는 국민투표를 열었다. 부코바르에서는 크로아티아 내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강경파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들이 세르비아계에게 독립투표 보이콧을 촉구하는 한편, 중도주의자들은 독립 국민투표를 독립 반대로 이끌기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라고 부추겼다. 많은 세르비아인이 투표에 불참했으나[253] 국민투표 결과 94%의 찬성으로 독립이 가결되었다.[254]

독립 투표 이후, 부코바르 및 주변 지역의 폭력 사태는 심각해졌다. 총격 및 폭탄 테러가 일상화되어 마을 및 근방 지역을 위협했다.[255] 6월부터 시작된 도시 내로의 산발적인 포격은 여름 들어서 점점 심해지기 시작했다. 부코바르 북쪽 교외 지역의 크로아티아계 다수 마을인 보로보 나셀레에선 7월 4일 엄청난 포격을 받았다.[256]

이 갈등은 민족적 배경이 약했다. 부코바르에 오랫동안 살고 있던 많은 세르비아인(스타로세디오치(starosedioci), old settlers라는 뜻)은 크닌과 베오그라드에서 지속적으로 나오는 선전을 믿지 않고 크로아티아인과 함께 살아가길 원하며 수 세기간 내려왔다. 하지만 1945년 추방당한 독일인 대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등지에서 들어온 도실라치(došljaci, newcomers라는 뜻)는 민족주의적 선전에 쉽게 반응했다.

3. 1. 민족 갈등 심화와 폭력 사태



부코바르는 크로아티아 동부 국경의 주요 지역 중심지로, 동부 슬라보니아에 위치해 있으며, 다뉴브 강 서안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지역은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헝가리인, 슬로바키아인, 루신인 등 다양한 민족이 거주했고,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이전에는 비교적 평화롭게 공존했다. 또한 전쟁 이전에는 유고슬라비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였다.[8]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독일인이 추방되고 유고슬라비아 다른 지역 출신 주민들이 이주하면서 부코바르는 큰 변화를 겪었다.[10] 1991년 유고슬라비아의 마지막 인구 조사에 따르면 부코바르와 주변 지역을 포함한 전체 인구는 84,189명이었고, 이 중 43.8%가 크로아티아계, 37.5%가 세르비아계, 나머지는 다른 민족이었다. 부코바르 도시 내에서는 크로아티아계가 47%, 세르비아계가 32.3%를 차지했다.[11]

1980년 요시프 브로즈 티토 사망 이후 억눌렸던 민족주의가 다시 떠올랐고, 각 공화국은 연방 정부의 권위 약화에 따라 더 많은 권한을 요구했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다당제 민주주의와 경제 개혁을 추진했지만, 세르비아의 권위주의적 공산당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개혁에 반대하며 유고슬라비아 정부의 권력 강화를 추구했다.[14] 1990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에서 선거가 열려 공산당 통치가 종식되고, 두 공화국에서는 독립을 지지하는 민족주의 정당이 집권했다. 크로아티아에서는 크로아티아 민주연합(HDZ)의 프라뇨 투지만이 대통령이 되었다.[15]

투지만 정부의 정책은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주민들의 반발을 샀다.[15] 밀로셰비치를 지지하는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 민주당(SDS)은 크로아티아 민주 연합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세르비아인 수천 명을 학살한 파시즘 우스타샤 운동의 부활이라고 비난했다.[16] 1990년 중반 이후 세르비아 민주당은 세르비아계 거주 지역에서 무장 반란을 일으키고 세르비아 정부와 세르비아 준군사 조직의 지원을 받아 크라이나 세르비아인 자치주(SAO 크라이나) 독립을 선포했다. 크로아티아는 공화국 내 대부분 지역에서 통제력을 빠르게 상실했다.[16] 1991년 2월, 크라이나 세르비아인 자치주는 크로아티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세르비아와 통일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다른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지역도 분리 독립을 선언하고 민병대를 조직했다.[17]

1991년 초,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간의 갈등은 동슬라보니아로 확산되었다. 4월 1일, 세르비아계 주민들은 부코바르와 동슬라보니아 여러 마을의 주요 도로에 바리케이드를 설치하기 시작했다.[18] 보이슬라브 셰셸이 이끄는 세르비아계 준군사 조직인 흰 독수리는 부코바르 바로 북쪽에 있는 세르비아계 마을인 보로보셀로로 이동했다.[19] 1991년 4월 중순 보로보 셀로 외곽에서 세르비아계 병사를 향해 암브러스트(Armbrust) 대전차유도탄 3기를 발사하여 기습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국방부 차관이었던 고이코 슈샤크가 공격을 지시했다.[20] 이 공격으로 사상자는 없었으나 민족 사이 긴장을 심화시켰다.[21] 5월 2일, 세르비아계 민병대는 보로보 셀로 중심에 있던 크로아티아 경찰 버스 2대를 공격하여 경찰관 12명이 사망하고 22명이 부상을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세르비아인 3명도 사망하였다.[18] 보로보셀로 전투는 당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세르비아-크로아티아 사이 충돌 중 가장 폭력적인 사태로 기록되었다.[23] 이 전투로 동부 슬라보니아에서 크로아티아인이 대폭발하여 슬라보니아 전역에서 인종간 폭력 사태가 심화되었다.[24]

얼마 지나지 않아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이 보로보 셀로로 이동했다. 크로아티아 지도자들은 군의 개입을 환영했지만, 크로아티아 내무부 차관 밀란 브레자크는 인민군이 크로아티아 경찰의 민병대 진압을 막고 있다고 비난했다.[25][26] 민병대 간의 총격전이 발생하기 시작했다.[24] 부코바르에서는 크로아티아인이 세르비아 주민들을 위협했으며, 때로는 폭력 사태로 이어지기도 했다. 크로아티아 경찰은 지역 라디오 방송국인 '라디오 부코바르'를 강제로 점거하여 인종차별적 발언을 퍼뜨리던 세르비아계 직원을 쫓아내고 크로아티아계로 채웠다.[27] 세르비아계 민병대는 부코바르 주변 세르비아계 다수 마을에서 부코바르로 향하는 도로를 막기 시작했고, 부코바르로 향하는 도로는 크로아티아계 마을을 지나는 비포장 도로 몇 개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부코바르의 상황은 "살인적인" 분위기가 되었다.[28]

1991년 5월 19일, 크로아티아 정부는 크로아티아 독립을 묻는 국민투표를 열었다. 부코바르에서는 크로아티아 내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강경파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들이 세르비아계에게 독립투표 보이콧을 촉구하는 한편, 중도주의자들은 독립 국민투표를 독립 반대로 이끌기 위해 적극적으로 참여하라고 부추겼다. 많은 세르비아인이 투표에 불참했으나[29] 국민투표 결과 94%의 찬성으로 독립이 가결되었다.[30]

독립 투표 이후 부코바르 및 주변 지역의 폭력 사태는 심각해졌다. 총격 및 폭탄 테러가 일상화되어 마을 및 근방 지역을 위협했다.[31] 6월부터 시작된 도시 내로의 산발적인 포격은 여름 들어서 점점 심해지기 시작했다. 부코바르 북쪽 교외 지역의 크로아티아계 다수 마을인 보로보 나셀레에선 7월 4일 엄청난 포격을 받았다.[32] 세르비아계 민병대는 비세르비아인이 살고 있는 여러 마을에 포격을 가했다.[33] 토미슬라브 메르체프가 이끄는 크로아티아계 민병대는 부코바르 주위의 세르비아계 민병대를 공격했다. 이 충돌로 세르비아인 30~86명가량이 실종되거나 사망했으며, 수천 명이 집을 떠나 피난하였다.[34][35] 부코바르의 크로아티아 정부는 "이 도시는 테러, 무장 투쟁, 도발적인 총격 사건의 희생양이 될 것이며 결국엔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다. 지금까지 추진된 정책으로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 사이 공포적 분위기가 만들어졌다."라고 말했다.[36] 양측의 무장 세력은 교외 지역의 농장과 가옥 수천 곳을 불태우고 약탈했다.[37]

갈등은 민족적 배경이 약했다. 부코바르에 오랫동안 살고 있던 많은 세르비아인(스타로세디오치(starosedioci), old settlers라는 뜻)은 크닌과 베오그라드에서 지속적으로 나오는 선전을 믿지 않고 크로아티아인과 함께 살아가길 원하며 수 세기간 내려왔다. 하지만 1945년 추방당한 독일인 대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등지에서 들어온 도실라치(došljaci, newcomers라는 뜻)는 민족주의적 선전에 쉽게 반응했다.

3. 2. 세르비아계 준군사조직의 활동

보이슬라브 셰셸이 이끄는 세르비아계 준군사조직인 흰 독수리가 보로보셀로로 이동했다.[245] 이들은 부코바르 북쪽에 거점을 마련하고 비세르비아계 주민들을 공격했다.[257] 한편, 토미슬라브 메르체프가 이끄는 크로아티아계 민병대는 부코바르 주변의 세르비아계 민병대를 공격하며 맞섰다. 이 과정에서 30~86명의 세르비아인이 실종되거나 사망했으며, 수천 명이 집을 떠나 피난길에 올랐다. 이 사건은 이후 1991년 부코바르 세르비아인 학살로 조사되었다.[258][259]

3. 3.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개입

보로보 셀로로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 부대가 이동했다. 군대의 개입은 지역 크로아티아 지도자들에게는 환영받았으나, 크로아티아 내무부 차관 밀란 브레작은 JNA가 크로아티아 경찰의 민병대 대응을 방해했다고 비난했다.[25][26] 이 지역 전역에서 경쟁 민병대 간의 총격전이 발생했다.[24] 부코바르에서는 크로아티아인들이 세르비아인 주민들을 괴롭혔고, 때로는 폭력적인 행위도 벌어졌다. 크로아티아 경찰은 지역 라디오 방송국인 라디오 부코바르를 강제로 장악했고, 방송국의 세르비아인들은 해고되고 크로아티아인으로 대체되었다.[27] 세르비아 민병대는 부코바르 주변의 세르비아인이 주로 거주하는 시골 지역의 교통로를 체계적으로 차단했고, 며칠 안에 마을은 크로아티아인이 거주하는 마을을 통과하는 비포장 도로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부코바르의 분위기는 "살벌했다"고 전해진다.[28]

4. 각 군의 병력

1991년 7월 말, 부코바르에 있던 크로아티아 방위군은 세르비아계 민병대에 의해 거의 포위된 상태였다. 세르비아계 마을에는 준군사조직,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 세르비아 영토방위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부코바르의 사이미슈테 지역에는 유고 인민군 막사가 있었는데, 이곳은 크로아티아 장악 지역에 둘러싸여 있었다.[265] 양측은 서로를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또는 "유고슬라비아"라고 불렀지만, 실제로는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외에도 유고슬라비아의 여러 민족이 전투에 참여했다. 부코바르를 처음으로 공격한 사령관은 마케도니아인이었다.[266] 반면 크로아티아 방어군 내에서도 일부는 세르비아인 및 기타 민족이 있었다.[270]

크로아티아 측과 유고슬라비아 및 세르비아 측 양측의 병력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었다.

각 군의 병력 구성
크로아티아 병력유고슬라비아 및 세르비아 병력


4. 1. 크로아티아 병력

부코바르의 크로아티아군은 대부분 새로 창설된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ZNG) 소속으로, 제3방위여단과 제1방위여단에서 차출된 400명을 포함하여 총 1,800명의 병력이었다.[42] 제3방위여단 제4대대는 원래부터 부코바르에 주둔했고, 제1방위여단 병력은 서부 시르미아 지역에서 후퇴하면서 합류했다. 이들 외에도 경찰관 300명과 부코바르 및 인근 지역 출신 자원병 1,100명이 있었다.[42] 이들은 초기에 즉흥적으로 편성되었다.[43] 1991년 9월 말, 제204 부코바르 여단(제124여단으로도 알려짐)으로 공식 재편되었다.[43]

크로아티아 각지에서 온 자원병 중에는 극우 민족주의 정당인 크로아티아 우익당(HSP)의 지원을 받는[45] 크로아티아 국방군(HOS) 소속 58명도 있었다. 부코바르 수비대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로 구성되었으며, 그중 약 3분의 1은 세르비아계, 루테니아계, 헝가리계 등 비(非)크로아티아계였다.[46] 수비대원 중 약 100명은 세르비아인이었다.[47] 한 크로아티아 참전 용사는 "우리는 그들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그들은 우리와 함께 부코바르를 지켰다"고 회고했다.[47]

부코바르 방어는 밀레 데다코비치가 지휘했는데, 그는 유고 인민군 장교 출신으로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에 합류하여 도시 방어를 맡았다.[48] 그는 전투 중에 '야스트레브'(Jastreb, 매)라는 가명을 사용했다.[49] 데다코비치의 부사령관 브란코 보르코비치 역시 유고 인민군 장교 출신으로 부코바르 방어에 자원했다.[51] 이들은 통일된 지휘 체계를 확립하고, 수비대를 단일 여단으로 편성하여 통합 방어 체계를 구축했다.[52] 방어 지역은 204여단 예하 부대에 각각 할당된 6개 구역으로 나뉘었다.[66] 수비대는 지하실, 운하, 도랑, 참호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필요에 따라 병력을 재배치했다.[53]

전투 초기, 수비대는 무장이 빈약했고, 많은 병력이 사냥용 소총으로 무장했다. 이들은 주로 경보병 무기에 의존했지만, 일부 포병과 대공포를 확보하고 자체적으로 지뢰를 제작하기도 했다.[54] 또한 M79, M80 등 대전차 무기 수백 점을 확보했으나, 탄약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42][55] 유고 인민군 막사를 점령하면서 무장 상태가 다소 개선되었고, 부코바르에 크로아티아군 전체 탄약의 약 55-60%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4. 2. 유고슬라비아 및 세르비아 병력

1991년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크로아티아 공세 작전 계획도. 부코바르 전투 결과로 유고 인민군은 크로아티아 영토 내 추가 작전 수행이 불가능해지면서 이 계획은 폐기되었다.


소코 G-4 슈퍼 갈레브와 같은 전투기들은 유고슬라비아 공군이 전투 기간 동안 많이 사용했다.


부코바르 공격군은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 영토방위군(TO), 체트니크(세르비아계 민족주의 민병대), 세르비아 지역 민병대, 유고슬라비아 공군, 유고슬라비아 해군으로 구성되었다.[279] 절정기에는 부코바르에 유고슬라비아군 및 세르비아군 병력이 약 36,000명가량 있었다.[281] 이들은 중포병, 로켓, 전차 등을 보유했고, 항공 및 다뉴브 강에서의 해상 지원을 받았다.[279]

전투는 유고슬라비아 연방 군사가 직접 참여했으나, 세르비아 정부도 직접 관여했다. 세르비아 비밀경찰국(SDB)이 군사 작전에 참여했으며, 일부 경찰 장교는 부코바르에서 세르비아 영토방위군 병력을 지휘했다.[282] 세르비아 내무부는 민병대 활동을 지시하고,[283] 무장과 장비를 지원했다.[284]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이후 전쟁범죄에 직접 참여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베셀린 슐리반차닌은 부코바르 포격 명령이 밀로셰비치가 살던 베오그라드 "데디녜"에서 나왔다고 증언했다.[285]

슬로베니아 전쟁 초기, 유고군은 스스로를 세르비아 민족주의 도구가 아닌, 공산주의 유고슬라비아 수호자로 인식했다. 벨리코 카디예비치는 유고슬라비아 유지를 위해 노력하며 세르비아-크로아티아 전쟁에서 중립을 선언했다.[286] 유고 인민군 지도부는 세르비아계 거주 지역(달마티아 해안 대부분, 중부/동부 크로아티아) 점령을 통해 크로아티아를 이분하려 했다. 목표는 크로아티아 정부가 항복하고 유고슬라비아 재협상에 나서도록 하는 것이었다.[287] 당시 유고 인민군은 세르비아계에 지배되지 않았고, 초기 목표는 '다민족 지도 하 유고슬라비아' 유지를 반영했다. 카디예비치는 크로아티아-세르비아계 혼혈, 부관은 슬로베니아인, 초기 전투 지휘관은 마케도니아인, 부코바르 폭격 공군 지휘관은 크로아티아인이었다.[266][288]

열흘 전쟁으로 슬로베니아 독립 후, 온전한 유고슬라비아 유지는 불가능해졌다. 많은 세르비아계 군인은 다민족 유고슬라비아를 위해 싸우고 싶어하지 않았다. 유고 군부는 비세르비아계 이탈, 징병 거부로 세르비아화되었다.[286] 일부 지휘관은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 반군을 지원하고 무기를 제공했다.[284] 카디예비치 등은 "유고 인민군은 모든 국가를 방어해야 한다"고 했으나,[284] 결국 세르비아계 반군을 지원하게 되었다.[286]

유고슬라비아와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 분리주의자들이 유고슬라비아 영토를 불법 점령하고 2차 대전 세르비아인 학살을 재현한다며 세르비아인을 위협한다는 프로파간다를 이용했다.[265] 카디예비치는 부코바르 방위군이 "크로아티아군 중추"이며 "해방"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고 인민군 정기간행물 '나로드나 아르미야'는 부코바르가 "다뉴브 강 아래 독일군 침투를 지원할 준비를 해 왔다"고 주장했다.[269] 보이슬라브 셰셸은 "우리는 모두 하나의 군대이다. 이 전쟁은 세르비아인에게 큰 시험이다. 시험 통과자는 승리, 탈영자는 처벌받을 것이다. 우스타샤는 부코바르를 빠져나가선 안 된다"고 선언했다.[289]

1991년 11월, 부코바르 방어군이 설치한 지뢰로 무력화된 유고 인민군 M-84 전차.


유고 인민군 보병 지원 부족은 낮은 병력 동원률 때문이었다. 크로아티아 등 유고슬라비아 공화국 예비군은 인민군 명령을 거부, 징집병은 싸우기를 거부하고 도망갔다.[304] 세르비아는 공식 참전하지 않아 동원령을 내리지 않았다.[305] 15만 명 이상 세르비아계가 징병을 피해 해외로 떠났고, 나머지는 도망/은신했다.[306] 징집 대상자 중 13%만 징병되었다.[307] 세르비아 전역에 약 4만 명 반군이 있었고, 브레메는 1991년 7월 "군사 붕괴"라고 표현했다.[308]

인민군 사기는 낮았다. 지휘관은 총을 쏴 부하들을 싸우게 했다. 부코바르 지휘관은 병력을 둘로 나눠 의지를 확인했는데, 결정 못한 징집병은 자살했다.[309] 부코바르 장교는 병력이 "전투 차량/무기를 버리고 존 레논Give Peace a Chance를 불렀다"고 회고했다. 10월 말, 노비사드 보병 대대는 보로보 나셀레 공격을 포기하고 탈영했다. 다른 예비군은 무기를 버리고 세르비아로 도망갔다.[310] 전차병 블라디미르 지브코비치는 전차를 베오그라드 의회 건물에 주차, 체포 후 정신이상자로 낙인찍혔다. 동료들은 라디오 방송국을 장악, "우리는 반역자가 아닌 침략자가 되기 싫다"고 항의했다.[311]

9월 말, 지보타 파니치가 부코바르 작전 지휘를 맡아 비효율적 조직을 해결하기 위해 새 지휘 체계를 수립했다. 파니치는 인민군을 남/북 책임구역으로 분할, 북부는 믈라덴 브라니치, 남부는 밀레 므르크시치가 지휘했다.[312] 증원 부대와 세르비아 자원군 민병대가 합류했다. 민병대는 무장/사기가 높았으나 훈련 부족, 잔인했다. 이들은 누락된 징집병을 대신해 중/대대 규모로 편입, 지휘받았다.[281] 노비사드 군단 지휘관은 젤코 라주나토비치("아르칸") 세르비아 의용방위군을 찬양했다.[313]

파니치는 사기 높은 민병대 보병, 훈련된 공병대(지뢰/방어 시설 파괴), 중장갑/포병 지원을 결합한 혼성 공세를 진행했다.[314]

5. 1차 공세: 1991년 8-9월

1991년 8월 말, 유고 인민군은 부코바르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시작했다.[41] 8월 23일, 보로보 나셀레는 대규모 포격을 받았으며, 크로아티아군은 휴대용 대공 미사일을 이용하여 소코 G-2 갈레브 전투기 2기를 격추했다.[41] 다음 날, 유고 인민군, 유고슬라비아 공군, 유고슬라비아 해군은 전투기, 다뉴브 강의 함선, 포병, 전차 등을 동원한 대공세를 펼쳤다.[41] 이 공격은 국경 양쪽에서 시작되었으며, 광범위한 피해와 많은 민간인 사상자를 낳았다.[41]

9월 14일, 크로아티아 정부는 모든 유고 인민군 진지 및 무기고에 대한 공격 명령을 내렸고, 이는 막사 전투로 이어진다. 부코바르의 인민군 막사도 이 날 공격받았으나, 인민군은 공격을 막아냈다.[67] 이에 대한 보복으로 세르비아계 준군사 조직이 부코바르 서남쪽에 있는 마을인 네고슬라브치를 공격하여 약 2,000명의 민간인이 피난을 떠났고, 대량 학살 및 민간인 사망자가 있었다는 보고도 있었다.[67] 부코바르 교두보 외곽에 있는 크로아티아군은 인민군 무기고를 급습하여 대량의 무기와 탄약을 노획하였고, 이는 차후 전투에서 전선을 유지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66]

유고 인민군은 동부 슬라보니아에서 대규모 공세를 펼쳐 빈코브치, 오시예크를 거쳐 자그레브를 향해 서쪽으로 진격했다. 유고 인민군은 지도부에서 포위된 막사를 구원하고 보급선에 가해지는 위협을 없애기 위해 부코바르를 지나치지 않고 정면 공격한다는 결정을 내렸다.[68]

9월 19일, 유고 인민군은 T-55, M-84 100여 대 이상, 장갑차, 중포병을 동원한 채 베오그라드에서 진격하기 시작한다. 9월 20일엔 시드 마을에서 국경을 넘어 크로아티아 내로 진입했다.[69] 크로아티아군은 신속히 길을 따라 부코바르로 집결해 모였다. 유고 인민군의 제1기계화방위여단은 부코바르 막사에 도착하여 막사를 포위한 크로아티아군을 깨뜨렸다. 또한 유고 인민군이 부코바르를 포위했다. 9월 30일이 되면 도시가 사실상 완전히 포위되었다.[70]

유고 인민군은 부코바르를 향해 계속 공격을 가했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넓게 펼쳐진 시골에서의 전투를 위해 설계된 장갑차량 등의 무기는 부코바르 도시 내의 좁은 골목으로 간신히 들어갈 수 있었다. 정규 보병의 지원은 부족했으며, 국경방위군은 제대로 훈련받지 못한 징병된 병력으로 별다른 전투 효율을 보이지 못했다.[57] 또한 인민군은 시가전을 수행하는 방법을 거의 알고 있지 못했으며 장교들은 느리고 수동적인 의사 결정을 내렸다.[71]

크로아티아군은 진입할 수 있는 도로에서 대전차 무기를 가진 이동형 분대를 파견해 인민군을 공격했으며, 수많은 저격병을 배치하고 잘 요새화된 곳에서 전투를 계속했다.[57] 크로아티아군은 20m도 안 되는 거리에서 대전차 무기를 이용하여 선두 및 후미 차량을 무력화하고 나머지 대열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여 공격하여 무력화시키는 전술을 사용했다.[73] 크로아티아는 무력화한 차량을 중요한 보급원으로 이용하기 위해 유고 인민군의 모든 차량을 파괴하는 것은 되도록 피했다.[74] 크로아티아 정부는 유고 인민군과의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히트 앤 런 전략을 이용한 "능동 방어" 전략을 채택했다.[75] 대전차 지뢰 및 대인지뢰를 이용하여 인민군의 기동을 방해했다. 또한 기상 측량 로켓[76]과 밤에 인민군 전차가 주차되어 있을 때 몰래 그 아래에 지뢰를 심어 놔 아침에 승무원이 기동을 시작했을 때 폭발하게 만드는 사보타주 등을 통하여 비전통적인 독특한 전술로 유고 인민군의 사기를 낮췄다.[77] 인민군의 사상자는 매우 심했다. 한 도로는 "전차의 묘지"로 불렸는데 인민군 전차 약 100대가 한 자리에서 파괴되었으며 그중 15대는 대령 마르코 비비치 혼자서 파괴한 것이었다.[78] 사상자가 많아지면서 지휘 계통을 따른 병력 대부분의 사기가 낮아지기 시작했다.[79]

유고 인민군은 도시를 향해 포병 포격 및 로켓 공격을 시작했다. 전투가 끝날 때 즈음이면 부코바르엔 최대 포탄 및 미사일 70만 개가 하루에 12,000개 꼴로[80] 떨어졌다.[97] 부코바르 및 인근 지역은 20mm 이상 구경의 포탄이 총 250만 발 이상 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81] 다닥다닥 붙어서 떨어진 포격은 스탈린그라드보다 더욱 높은 밀도였다.[51] 부코바르에 남아 있던 수천 명의 민간인은 지하실 및 냉전 시기 지어진 포격 대피소에서 몸을 피했다.[70]

6. 2차 공세: 1991년 10-11월

9월 말, 지보타 파니치가 부코바르 작전 지휘관으로 부임했다. 그는 부임하자마자 유고 인민군의 비효율적인 조직을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본부와 지휘 통제 체계를 수립했다. 파니치는 인민군 병력을 남부와 북부 2개의 책임구역으로 나누었다. 북부 구역은 믈라덴 브라니치 소장이, 남부 구역은 밀레 므르크시치 대령이 지휘를 맡았다.[312] 새로 증원된 부대에 더해 세르비아에서 온 자원군 민병대 병력도 합류했다. 이들은 무장 수준이 좋았고 사기가 높았으나, 제대로 훈련받지 못했고 잔혹했다. 이들은 누락된 징집병을 대신하여 중대와 대대 규모로 편입되어 지휘를 받았다.[281] 노비사드 군단의 지휘관은 전투 이후 녹화한 영상에서 젤코 라주나토비치(아르칸)가 이끄는 세르비아 의용방위군을 칭찬했다.[313]

파니치는 사기가 높은 민병대 보병에 훈련받은 공병대가 지뢰와 방어 시설을 파괴하고 중장갑과 포병의 지원을 받으면서 혼성 공세를 진행했다.[314] 민병대 조직은 9월 30일부터 시작되는 새 공격의 주공을 맡았다. 부코바르로 향하는 크로아티아의 보급선을 끊기 위해 마린치 마을을 공격하였고 10월 1일 점령에 성공한다. 직후 크로아티아 제204여단의 지휘관인 밀레 데다코비치는 소규모 호위대로 세르비아 전선을 돌파하여 탈출, 근처의 작은 크로아티아 마을인 빈코브치 마을에 도착했다. 데다코비치의 부관인 브란코 보르코비치가 부코바르 방어전의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부코바르 교두보 외곽의 크로아티아군을 이끄는 장군 안톤 투스는 데다코비치를 도시 포위를 풀기 위한 작전에 투입하기로 결정하고 10월 13일 반격을 시작했다.[281][315] 아침 일찍 포병 작전을 시작으로 병력 800명과 전차 10대를 동원한 작전이 시작되었다. 특수경찰은 정오가 되기 전에 마린치 마을에 닿았으나, 전선을 유지할 만한 병력이 없어 결국 퇴각하였다. 크로아티아군 전차와 병력은 유고 인민군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쳤고 누스타르 마을에서 포격으로 진격이 중지되었다. 유고 인민군 제252기갑여단이 크로아티아군에게 큰 손실을 입혔고 13시경 크로아티아군은 모든 공세를 중지했다. 이후 적십자사의 인도주의적 호송대가 부코바르 마을로 향했다.

부코바르 전투 마지막 시기의 지도. 유고 인민군과 세르비아군이 부코바르를 완전히 포위한 후 체계적으로 마을을 하나씩 장악했다.


전투가 끝나가는 동안, 부코바르 내에 남은 주민들은 최대 7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지하실 및 공동피난소로 들어가 피난했다. 부코바르 시립 병원 지하의 핵벙커에는 위기위원회가 설립되었다. 이 위원회는 마을 행정을 통제하고 식량, 물, 의약품 보급을 총괄했다. 거리에 있는 민간인의 수를 최소한으로 줄였으며 보호받는 각각의 피난처 내엔 적어도 한 명 이상의 의사와 간호사가 배치되어 있도록 하였다.[316]

부코바르 병원에선 수백 명의 부상자를 치료해야 했다. 9월 둘째 주가 되면 부상자는 하루에 16-80명 꼴로 나왔으며 이 중의 3/4 이상은 민간인이었다.[290] 부코바르 병원은 적십자 표식을 그렸으나 정작 전투 중 800발 이상의 포격을 맞았다. 건물 대부분은 포격으로 만신창이가 되었고 직원과 환자는 지하 관리용 회랑을 통해 이동해야 했다. 중환자실은 병원 내의 핵벙커로 옮겼다.[230] 10월 4일, 유고슬라비아 공군은 병원을 폭격하여 수술실을 파괴했다. 하나의 폭탄이 여러 층을 뚫고 지나가면서 폭발하지 않고 한 사람 발 밑에 떨어지는 일도 있었으나 부상을 입진 않았다.[290]

크로아티아군은 안토노프 An-2 수 기를 동원하여 부코바르 내로 보급품을 낙하 보급시켰다. 또한 보급품 외에도 화약 및 금속 막대로 가득 찬 폭발물과 보일러로 만든 즉석폭탄도 투하하여 폭격을 시도했다.[317] 승무원들은 GPS를 이용하여 표적의 위치를 찾은 후 측면에 있는 문을 열어 떨어뜨렸다.[318]

유럽 공동체는 교두보 안에 갇혀 있는 민간인 12,000명에게 인도주의적 원조를 제공하려 시도했으나 겨우 하나의 호송대만 원조할 수 있었다.[319] 10월 12일엔 크로아티아가 호송대 이동을 위해 군사 행동을 중단했으나, 유고 인민군은 이 전투 중단 시기를 차후 군사 작전을 위한 보충 기간으로 이용했다. 일단 호송대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인민군은 대인 지뢰 살포를 통해 이틀을 지연시켰고 그 동안 병력을 보강하고 인민군이 부코바르로 향하는 도로의 통제를 강화하는 데 사용했다.[320] 호송대가 부코바르로 도착하고 나선 부코바르 병원으로 의약품을 전달하였고 부상자 114명을 싣어 대피시켰다.[319]

10월 16일, 유고 인민군은 보로보 나셀레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가했다. 일부 진전이 있었으나 결정적으로 크로아티아군의 강한 저항으로 수렁에 빠졌다.[281] 10월 30일엔 유고 인민군이 준군사 조직이 주공을 맡고 보병 및 공병대가 체계적으로 크로아티아군의 전선을 비껴가도록 하는 체계적 공세를 시작했다. 북부 및 남부 작전 구역으로 나눈 인민군은 여러 차례 동시에 공세를 가해 크로아티아군을 후퇴시켰다.[314] 또한 인민군은 집 안에다가 사격을 하며 최루탄발연통을 쏴서 내부에 있던 사람을 쫓아낸 후 전차를 기동하는 등 새로운 전술을 도입했다. 또한 건물도 대전차포 및 대공포를 동원하여 장악했다.[321]

11월 2일, 유고 인민군은 보로보 나셀레와 부코바르 사이에 있는 전략적 교외 지역인 루자치에 도착하며 마을 중심과 북부 교외로 향하는 2개 도로 중 하나를 끊었다.[326] 한편,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나중에 크로아티아 육군으로 개칭)은 마린치와 세리치 마을을 되찾아 부코바르로 향하는 보급로를 개척하기 위해 공세를 시도했다. 유고 인민군의 부코바르로 향하는 가용 도로에 강렬한 포격을 했으며 인민군 보급로를 전차로 공격했다. 11월 4일엔 인민군 장군인 믈라덴 브라니치가 전투 중 포탄이 탑승해 있던 전차에 직격하여 사망했다.[278] 하지만 강력한 유고 인민군의 포격 및 로켓 공격으로 크로아티아군의 공세가 돈좌되고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278]

1991년 10월 4일 유고슬라비아 공군의 폭격으로 피해를 입은 부코바르 병원.


유고 인민군 부대는 11월 3일 루자치 북쪽의 다뉴브 강을 건너 아르칸이 이끄는 준군사 조직 "타이거"와 연결하기 위해 수륙 양용 작전을 시작했다. 이 공격으로 크로아티아군의 교두보가 반으로 갈라졌고 보로보 나살레의 작은 거점과 부코바르 시내의 큰 거점 2개로 쪼개졌다. 인민군의 남부작전군은 도시 중심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하며 남아있는 크로아티아 병사를 분쇄했다.[314] 이 군은 11월 9일 시내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주요 고지인 밀로바 브르다를 점령하여 도시를 한눈에 볼 수 있게 되었다.[326] 이 공격은 준군사 조직이 주공을 맡았으나 유고 인민군과 영토방위군이 군사적 지원을 해줬으며 특히 해체 작업 및 근거리 포격 지원을 전폭적으로 제공했다.[314] 부코바르 서쪽의 크로아티아군이 장악하고 있던 보그다노브치는 11월 10일 함락되었다.[326] 이 과정에서 크로아티아 민간인 87명이 체포된 후 처형되었다.[322] 11월 13일엔 인민군이 보로보 나셀레와 부코바르를 잇는 마지막 거점을 장악, 차단했다. 부코바르 교두보 외곽의 크로아티아군은 누시타르 마을에서 부코바르의 포위를 깨뜨릴 마지막 공격을 가했으나 유고 인민군의 반격으로 격퇴되었다. 이 즈음 크로아티아군은 탄약이 바닥났고 구호의 전망 없이 24시간 내내 계속된 전투로 지쳐 있는 상태였다.[326]

7. 부코바르 함락

11월 13일, 유고 인민군은 보로보 나셀레와 부코바르를 잇는 마지막 거점을 장악하여 두 지역을 완전히 차단했다.[326] 부코바르 외곽의 크로아티아군은 누시타르 마을에서 공격을 시도하여 부코바르 포위망을 뚫으려 했으나, 유고 인민군의 반격으로 실패했다. 이 시점에서 크로아티아군은 탄약이 부족했고, 장기간의 전투로 지쳐 있었으며, 외부 지원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326]

부코바르 포위망은 세 개의 작은 포위망으로 축소되었다. 패배가 임박하자, 유고 인민군이 최후 공세를 펼치는 동안 수백 명의 크로아티아군과 민간인들이 며칠간 부코바르를 탈출하려 시도했다.[326] 그러나 보로보 나셀레에 갇힌 대부분의 사람들은 탈출하지 못하고 살해당했다.[278] 11월 18일, 부코바르 시내 중심부에 남아 있던 마지막 크로아티아군 병력이 항복했다.[314]

11월 18일까지 부코바르에 있던 많은 민간인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며 굶주림에 시달렸다. 한 여성은 유엔 특사 사이러스 밴스에게 지난 두 달 동안 다섯 자녀와 함께 화장실과 씻을 물도 없이 대피소에서 생활했다고 증언했다. 이들은 하루에 빵 두 조각과 파테 한 조각으로 연명했다고 한다. 한 크로아티아 병사는 전투가 절정에 달했을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전투가 끝난 후, 수 주 동안 대피소에서 나오지 않았던 많은 사람들은 도시의 파괴 규모에 충격을 받았다. 크로아티아 라디오 기자이자 부코바르 출신으로 전투 기간 동안 도시에 머물렀던 시니샤 글라바셰비치는 생존자들이 나타났을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함락 열흘 후의 부코바르. 부코바르 거리가 잔해로 뒤덮여 있다.


부코바르 중심부의 전투는 11월 18일에 끝났지만, 도시 곳곳에서는 산발적인 전투가 계속되었다. 일부 크로아티아 병사들은 11월 20일까지 저항했고, 그 중 일부는 11월 23일 보로보 나셀레에서 탈출했다.[326] 해외 언론인과 국제 감시단은 도시 항복 후 현장에 들어와 자신들이 본 것을 기록했다. 워싱턴 포스트의 블레인 하든은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뉴욕 타임스의 처크 수데틱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라우라 실버와 BBC의 앨런 리틀은 "사람과 동물의 시체가 길거리에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건물의 거대한 골격은 불타고 있었으며 성한 곳은 거의 없었다. 세르비아 자원군은 야생의 눈으로 거리를 질주하고 주머니는 가득 차 있었다. 이들은 마구 약탈하고 있었다"고 말했다.[328] 유고 인민군은 승리를 자축하며 마크 챔피언은 인디펜던트 지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했다.

8. 부코바르 함락 이후 상황

부코바르는 전투로 인해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다. 크로아티아 측에서는 부코바르를 "유럽의 스탈린그라드"라고 부르기도 했다.[202]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과 세르비아계 준군사조직은 도시를 점령한 후 조직적인 약탈을 자행했다. 이들은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비세르비아계 주민들을 강제 추방하는 등 인종 청소를 자행했다.[7] 부코바르 병원에서 끌려간 약 400명 중 200여 명은 오브차라 농장으로 이송되어 부코바르 학살로 알려진 사건으로 처형되었다.[127] JNA는 벨레프로메트 산업 시설에 2,000명을 수감했고, 이들 중 상당수는 고문 및 학살을 당했다.[129] 생존자들은 스렘스카 미트로비차에 있는 JNA 운영 교도소로 이송되어 가혹 행위를 당했다.[129][130]

베스나 보사나츠 의사, 시니샤 글라바셰비치 기자 등 저명인사들도 체포되어 학살당했다.[137][139][111]

흙길 옆에 잡초가 우거진 붉은 지붕의 긴 농가 건물의 모습
전투 후 약 260명이 학살된 오바라 돼지 농장

9. 전쟁 범죄



부코바르 전투가 끝난 후, 수많은 크로아티아 군인과 민간인이 즉결 처형되었다. 민간인 복장을 한 시체가 도로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339] BBC 텔레비전 기자들은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Slobodane, Slobodane, šalji nam salate, biće mesa, biće mesa, klaćemo Hrvate!|슬로보단, 슬로보단,우리에게 고기가 (될 사람을 위한) 샐러드를 보내시오. 그들은 고기가 되어, 고기가 되어 크로아티아인은 도살당할 것이다!sr"라고 외치는 것을 기록했다.[340]

부코바르 병원에 있던 비세르비아계 환자, 의료진, 지역 정치인 등 400여 명이 유고 인민군에게 체포되었다. 약 200명은 오브차라 수용소로 끌려가 부코바르 학살이라 불리는 학살을 당했고, 최소 50명은 다른 곳으로 끌려가 실종되었다.[342]

달 마을에서는 부코바르 출신 포로들이 심문, 구타, 고문을 당했으며 최소 35명 이상이 사망했다.[343] 유고 인민군은 베레프로메트 수용소에 2천 명을 투옥했으며, 이 중 800명은 전쟁 포로로 분류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잔혹한 심문을 당했으며, 일부는 즉결 총살당하거나 오브차라 수용소로 끌려갔다. 나머지는 스렘스카미트로비차 감옥 수용소로 끌려갔다.[344][345] 대부분은 1992년 1월 유엔 특사 사이러스 밴스의 중재로 풀려났으나,[328] 나머지는 1992년 중반까지 수용되었다.[346] 크로아티아 측에서 싸운 세르비아인은 '배신자'로 간주되어 가혹한 대우를 받았다.[271]

부코바르와 인근 지역 주민 2만 명이 인종 청소를 당해 강제 추방되었고, 동부 슬라보니아 전역에서 수만 명이 추가로 추방당했다.[233] 전투 결과 약 2,600명이 실종되었고,[347] 2017년 11월 기준 440여 명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348] 전시 강간 사건도 발생했으며, 가담 군인 2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349][350][351]

세르비아군은 부코바르 병원장 베스나 보사나츠[353]와 기자 시니샤 글라바셰비치 등을 체포했다.[328][354] 보사나츠 부부는 스렘스카미트로비차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국제 적십자 위원회의 항소로 석방되었고,[328][353] 글라바셰비치는 오브차라 수용소에서 구타당한 후 총살당했다.[328][354]

부코바르는 함락 이후 체계적으로 약탈당했다. 유고 인민군 병사는 "체트니크(준군사조직)는 전문적인 약탈가처럼 행동했다"고 증언했다.[355] 유고 인민군도 약탈에 관여했으며,[356] 전투 기간 동안 미술품 8천 점이 약탈되었다.[357] 세르비아는 2001년 12월 약탈했던 미술품 중 2천 점을 반환했다.[358]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는 밀레 므르크시치, 베셀린 슐리반차닌, 미로슬라브 라디치 등 유고 인민군 장교 3명을 인도에 반한 죄전시국제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2007년 9월 27일, 므르크시치는 살인 및 고문 혐의로 20년형, 슐리반차닌은 고문 혐의로 5년형을 선고받았고, 라디치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359] 슐리반차닌의 형량은 항소심에서 17년으로 늘었다가,[360] 2차 항소 후 10년형으로 줄어들었으며 2011년 7월 조기 석방되었다.[361] 부코바르의 세르비아계 시장 슬라브코 도크마노비치도 학살 가담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1998년 6월 판결 직전 자살했다.[362]

세르비아계 민병대 지휘관 보이슬라브 셰셸은 여러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363] 2016년 3월 셰셸은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364] 2018년 4월 11일 국제형사재판 항소재판소에서 1992년 5월 보이보디나의 크로아티아인 절멸 발언 연설로 인도에 반한 죄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부코바르 등 크로아티아 각지에서 일으킨 전쟁 범죄에 대해선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ICTY는 세르비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공동범죄집단(JCE)의 일원으로 유고 인민군 및 세르비아계 민병대를 지휘하여 전쟁범죄를 일으켰다고 지목했다. 밀로셰비치는 여러 인도에 반한 죄, 국제전쟁법 위반, 제네바 협약 위반 등의 죄목으로 기소되었으나,[233] 재판이 끝나기 전인 2006년 3월 사망했다.[365] 세르비아군 지휘관 고란 하지치는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으며,[366] 2011년 7월 체포되어[367] 14건의 죄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368] 하지치는 재판이 끝나기 전인 2016년 7월 사망했다.[369]

2005년 12월, 세르비아 법원은 부코바르 병원 학살 가담자 14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370] 2011년엔 세르비아 법원이 부코바르에서의 전쟁 범죄 혐의로 크로아티아인 40명을 기소했다.[371] 크로아티아 법원도 벨코 카디예비치, 블라고예 아지치[373] 등 세르비아계 전범을 기소했다.[374] 아지치는 2012년 3월 사망했고,[375] 카디예비치는 러시아로 망명하여 2008년 러시아 시민권을 얻고 2014년 11월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376][377]

1999년 크로아티아는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유고슬라비아를 제소했고, 2006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해체 후 피고소자는 세르비아로 넘어갔다. 2015년 2월, ICJ는 부코바르 전투 및 학살이 "제노사이드"는 아니지만 심각한 전쟁범죄라고 판결했다.[378][379]

9. 1. 부코바르 학살



부코바르 전투가 끝난 후, 유고 인민군(JNA)과 세르비아계 준군사조직은 부코바르 병원에서 비세르비아계 환자, 의료진, 지역 정치인, 피난민 등 400여 명을 체포했다.[127] 이들 중 일부는 석방되었으나, 약 200명은 오브차라 농장으로 이송되어 부코바르 학살이라 불리는 사건에서 처형되었다.[127] 최소 50명은 다른 곳으로 끌려간 후 실종되었다.[127]

기자들은 부코바르 시내에서 학살 장면을 목격하고, 길거리에 널린 민간인 복장의 시신들을 보도했다.[123][124] BBC 텔레비전은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Slobodane, Slobodane, šalji nam salate, biće mesa, biće mesa, klaćemo Hrvate!|슬로보단, 슬로보단, 우리에게 고기가 (될 사람을 위한) 샐러드를 보내시오. 그들은 고기가 되어, 고기가 되어 크로아티아인은 도살당할 것이다!sr"라고 외치는 장면을 기록했다.[125]

유고 인민군 예비군에 있던 한 세르비아인 기자는 부코바르 함락 후 사람들이 줄지어 구금 지역으로 끌려갔으며, 세르비아계 준군사 병사가 무작위로 사람들을 "전쟁범죄자"라며 처형했다고 증언했다. 이들은 부코바르 함락 이후 치안 유지를 담당하던 베셀린 슐리반차닌의 감독 및 허가 하에 처형되었다.[126]

부코바르 학살 이후에도 대량 살해는 계속되었다. 달 마을에서는 부코바르 출신 포로들이 심문, 구타, 고문을 당했으며 최소 35명이 사망했다.[128] 유고 인민군은 부코바르의 베레프로메트 수용소에 2천 명을 투옥했으며, 이 중 800명은 전쟁 포로로 분류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잔혹한 심문을 당했고, 일부는 즉결 총살당했으며, 다른 사람들은 오브차라 수용소로 끌려가 학살당했다.[129][130] 나머지 포로는 스렘스카미트로비차 감옥 수용소로 이송되어 가혹한 대우를 받았다. 대부분은 1992년 1월 유엔 특사 사이러스 밴스의 중재로 풀려났지만, 나머지는 1992년 중반까지 수용되었다.[111][131] 크로아티아 측에 붙어 싸운 세르비아인은 '배신자'로 간주되어 더욱 가혹한 대우를 받았다.[47]

부코바르와 인근 지역의 비세르비아계 주민들은 체계적인 인종 청소를 당해 2만 명이 강제 추방되었고, 동부 슬라보니아 전역에서 수만 명이 추가로 추방되었다.[7] 전투 결과 2,600명이 실종되었으며, 2017년 11월 기준으로 440명 이상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132][133] 전시 강간 사건도 발생해, 가담 군인 2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134][135][136]

세르비아군은 부코바르 병원장 베스나 보사나츠와 기자 시니샤 글라바셰비치 등 유명 인사를 체포했다. 보사나츠와 남편은 스렘스카미트로비차 교도소에 수감되어 가혹한 대우를 받았으나, 국제 적십자 위원회의 항소 이후 석방되었다.[137][111] 글라바셰비치는 오브차라 수용소에서 구타당한 후 총살당했다.[139][111]

부코바르는 함락 이후 체계적으로 약탈당했다. 유고 인민군 병사는 "체트니크(준군사조직)는 전문적인 약탈가처럼 행동했다"고 증언했으며, 유고 인민군도 약탈에 관여했다.[140][141] 전투 기간 동안 엘츠 마노르 부코바르 시립 박물관의 작품을 포함하여 8천 점의 미술품이 약탈되었으며, 세르비아는 2001년 12월 2천 점을 반환했다.[142][143]

유고 인민군 장교 밀레 므르크시치, 베셀린 슐리반차닌, 미로슬라브 라디치는 인도에 반한 죄전시국제법 위반죄로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에 기소되었다. 므르크시치는 20년형, 슐리반차닌은 5년형(항소 후 17년, 2차 항소 후 10년)을 선고받았고, 라디치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144][145][146] 부코바르의 세르비아계 시장 슬라브코 도크마노비치는 체포되었지만 1998년 판결 직전 자살했다.[147]

세르비아계 민병대 지휘관 보이슬라브 셰셸은 부코바르 병원 학살 등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2016년 3월 무죄 판결을 받았다.[148][149] 2018년 4월, 국제형사재판 항소재판소는 셰셸에게 1992년 5월 보이보디나의 크로아티아인 절멸 발언 연설로 인도에 반한 죄로 10년형을 선고했지만, 부코바르 등 다른 지역의 전쟁 범죄에 대해서는 무혐의 처분을 내렸다.[150]

ICTY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를 동슬라보니아를 포함한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계 다수 지역에서 비세르비아계인을 제거하기 위한 공동범죄집단(JCE)의 일원으로 유고 인민군 및 세르비아계 민병대를 지휘하여 전쟁범죄를 일으켰다고 지목했다. 밀로셰비치는 인도에 반한 죄, 국시 국제전쟁법 위반, 제네바 협약 위반 등의 죄목으로 기소되었으나, 재판이 끝나기 전인 2006년 3월 사망했다.[7][151]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군 지휘관 고란 하지치는 부코바르의 크로아티아인 강제 추방 등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2016년 7월 재판 중 사망했다.[152][153][154]

2005년 12월, 세르비아 법원은 부코바르 병원 학살에 연루된 전 민병대 조직원 14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155] 2011년 세르비아 법원은 부코바르에서의 전쟁 범죄 혐의로 크로아티아인 40명을 기소했으나, 초기 기소는 중단되었다.[156][157] 크로아티아 법원도 부코바르에서의 전쟁 범죄 혐의로 세르비아인을 다수 기소했다.[158] 전 유고 인민군 장군 벨코 카디예비치블라고예 아지치도 기소되었으나, 아지치는 2012년 사망했고 카디예비치는 러시아로 망명 후 사망했다.[160][161] 1999년 크로아티아는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유고슬라비아를 고소했고, 2015년 2월 ICJ는 전투와 학살이 "제노사이드" 범죄는 아니지만 유고 인민군 및 세르비아계 준군사조직이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을 인정했다.[162][163]

9. 2. 기타 전쟁 범죄

부코바르 전투 이후, 수많은 크로아티아 군인과 민간인들이 즉결 처형되었다. 기자들은 부코바르 대로에서 이러한 살해 장면을 목격했으며,[338] 민간인 복장을 한 시체들이 거리에 흩어져 있는 것을 보았다.[339] BBC 텔레비전 기자들은 세르비아계 민병대가 "슬로보단, 슬로보단, 우리에게 고기가 (될 사람을 위한) 샐러드를 보내시오. 그들은 고기가 되어, 고기가 되어 크로아티아인은 도살당할 것이다!"라고 외치는 것을 녹음했다.[340]

부코바르 병원에 있던 비세르비아계 환자, 의료진, 지역 정치인 등 400여 명이 유고 인민군에 체포되었다. 이들 중 일부는 풀려났으나, 약 200명은 오브차라 수용소로 끌려가 부코바르 학살이라 불리는 학살을 당했다. 최소 50명은 다른 곳으로 끌려가 실종되었다.[342]

부코바르 북부의 달 마을에서는 이전에 학살당한 경험이 있었는데, 부코바르 출신 포로들이 가혹한 심문, 구타, 고문을 당했으며 최소 35명 이상이 사망했다.[343] 유고 인민군은 부코바르에 있는 베레프로메트 수용소에 2천 명을 투옥했으며, 이 중 800명은 전쟁 포로로 분류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잔인한 심문을 당했으며, 일부는 즉결 총살당하거나 오브차라 수용소로 끌려가 학살당했다. 나머지는 스렘스카미트로비차 감옥 수용소로 끌려갔다.[344][345] 포로 대부분은 1992년 1월 유엔 특사 사이러스 밴스가 중재한 협약에 따라 풀려났다.[328] 나머지는 1992년 중반까지 수용되어 있었다.[346] 크로아티아 측에서 싸운 세르비아인은 '배신자'로 간주되어 더욱 가혹한 대우를 받았다.[271]

부코바르와 인근 지역의 비세르비아계 사람들은 체계적인 인종 청소를 당해 부코바르 내 주민 2만 명이 강제 추방되었고, 동부 슬라보니아 전역에서 수만 명이 추가로 추방당했다.[233] 전투 결과 약 2,600명이 실종되었고,[347] 2017년 11월 기준으로 440여 명의 소재가 파악되지 않고 있다.[348] 전시 강간 사건도 발생했으며, 가담 군인 2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349][350][351]

세르비아군은 크로아티아에서 영웅으로 여겨졌던 부코바르 병원장 베스나 보사나츠[353]와 기자 시니샤 글라바셰비치 등을 체포했다.[328][354] 보사나츠 부부는 스렘스카미트로비차 교도소에 수감되었다가 국제 적십자 위원회의 항소 이후 석방되었고,[328][353] 글라바셰비치는 오브차라 수용소에서 구타당한 후 총살당했다.[328][354]

부코바르는 함락 이후 체계적으로 약탈당했다. 유고 인민군 병사는 "체트니크(준군사조직)는 전문적인 약탈가처럼 행동했다"고 증언했다.[355] 유고 인민군도 약탈에 관여했으며,[356] 전투 기간 동안 미술품 8천 점이 약탈되었다.[357] 세르비아는 2001년 12월 약탈했던 미술품 중 2천 점을 반환했다.[358]

유고 인민군 장교 밀레 므르크시치, 베셀린 슐리반차닌, 미로슬라브 라디치는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에 기소되었다. 2007년 9월 27일, 므르크시치는 20년형, 슐리반차닌은 5년형(항소 후 17년형, 2차 항소 후 10년형), 라디치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359][360][361] 부코바르의 세르비아계 시장 슬라브코 도크마노비치도 기소되었지만 1998년 6월 판결 직전 자살하였다.[362]

세르비아계 민병대 지휘관 보이슬라브 셰셸은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으나,[363] 2016년 3월 무죄 판결을 받았다.[364] 2018년 4월 11일, 국제형사재판 항소재판소에서 1992년 5월 보이보디나의 크로아티아인 절멸 발언 연설로 인도에 반한 죄로 기소되어 10년형을 선고받았지만, 부코바르 등 크로아티아 각지에서 일으킨 전쟁 범죄 및 인도에 반한 죄에 대해선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ICTY는 세르비아의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공동범죄집단(JCE)의 지휘자로 지목하고 기소했으나,[233] 밀로셰비치는 재판이 끝나기 전인 2006년 3월 사망했다.[365] 고란 하지치는 부코바르의 크로아티아인 강제 추방 혐의 등으로 기소되었으나,[366] 2016년 7월 재판이 끝나기 전 사망했다.[369]

2005년 12월, 세르비아 법원은 부코바르 병원 학살에 연루된 전 민병대 조직원 14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370] 2011년엔 세르비아 법원이 부코바르에서의 전쟁 범죄 혐의로 크로아티아인 40명을 기소했다.[371] 크로아티아 법원도 전 유고 인민군 장군 벨코 카디예비치와 블라고예 아지치[373]를 포함하여 부코바르에서의 전쟁 범죄 혐의로 세르비아인을 다수 기소했다.[374] 아지치는 2012년 3월 사망했고,[375] 카디예비치는 러시아로 망명하여 2014년 11월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376][377] 1999년 크로아티아는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유고슬라비아를 고소했고, 2015년 2월 ICJ는 전투와 학살이 "제노사이드" 범죄는 아니지만 심각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은 인정했다.[378][379]

9. 3. 전범 기소 및 재판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는 밀레 므르크시치, 베셀린 슐리반차닌, 미로슬라브 라디치 등 유고 인민군 장교 3명을 인도에 반한 죄전시국제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2007년 9월 27일, 므르크시치는 살인 및 고문 혐의로 20년형, 슐리반차닌은 고문 혐의로 5년형을 선고받았고, 라디치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359] 슐리반차닌의 형량은 항소심에서 17년으로 늘었다가,[360] 2차 항소 후 10년형으로 줄어들었으며 2011년 7월 조기 석방되었다.[361] 부코바르의 세르비아계 시장 슬라브코 도크마노비치도 학살 가담 혐의로 체포되었으나, 1998년 6월 판결 직전 자살했다.[362]

세르비아계 민병대 지휘관 보이슬라브 셰셸은 부코바르 병원 학살 등 여러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다.[363] 2016년 3월 셰셸은 모든 혐의에 대해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364] 2018년 4월 11일 국제형사재판 항소재판소에서 1992년 5월 보이도디나의 크로아티아인 절멸 발언 연설로 인도에 반한 죄로 1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부코바르 등 크로아티아 각지에서 일으킨 전쟁 범죄 및 인도에 반한 죄에 대해선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ICTY는 세르비아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를 동슬라보니아를 포함한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다수 지역에서 비세르비아계인을 제거하기 위한 공동범죄집단(JCE)의 일원으로 유고 인민군 및 세르비아계 민병대를 지휘하여 전쟁범죄를 일으켰다고 지목했다. 밀로셰비치는 여러 인도에 반한 죄, 국제전쟁법 위반, 제네바 협약 위반 등의 죄목으로 기소되었으나,[233] 재판이 끝나기 전인 2006년 3월 사망했다.[365] 세르비아군 지휘관 고란 하지치는 부코바르의 크로아티아인 강제 추방 등 전쟁 범죄 혐의로 기소되었으며,[366] 2011년 7월 체포되어[367] 14건의 죄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368] 하지치는 재판이 끝나기 전인 2016년 7월 사망했다.[369]

2005년 12월, 세르비아 법원은 부코바르 병원 학살 가담자 14명에게 유죄 판결을 내렸다.[370] 2011년엔 세르비아 법원이 부코바르에서의 전쟁 범죄 혐의로 크로아티아인 40명을 기소했다.[371] 크로아티아 법원도 벨코 카디예비치, 블라고예 아지치[373] 등 세르비아계 전범을 기소했다.[374] 아지치는 2012년 3월 사망했고,[375] 카디예비치는 러시아로 망명하여 2008년 러시아 시민권을 얻고 2014년 11월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376][377]

1999년 크로아티아는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유고슬라비아를 제소했고, 2006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해체 후 피고소자는 세르비아로 넘어갔다. 2015년 2월, ICJ는 부코바르 전투 및 학살이 "제노사이드"는 아니지만 심각한 전쟁범죄라고 판결했다.[378][379]

10. 정치적 측면



부코바르는 크로아티아 동부 국경의 중요한 지역 중심지로, 동부 슬라보니아에 위치해 있으며, 다뉴브 강 서안에 자리 잡고 있다. 이 지역에는 크로아티아인, 세르비아인, 헝가리인, 슬로바키아인, 루신인 등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이전 수세기 동안 비교적 조화롭게 함께 살아왔다. 또한 분쟁 이전에는 유고슬라비아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였다.[8] 부코바르의 오랜 번영은 크로아티아 최고의 바로크 건축 앙상블 중 하나에 반영되어 있다.[9]

이 지역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인구 통계학적 주요 변화를 겪었는데, 당시 민족 독일인 거주자들이 추방되고 유고슬라비아의 다른 지역에서 온 정착민들로 대체되었다.[10] 1991년, 타운과 주변 마을을 포함하는 부코바르 자치구의 마지막 유고슬라비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인구는 84,189명으로, 이 중 44%가 크로아티아인, 38%가 세르비아인이었고 나머지는 다른 민족 집단에 속했다. 타운의 인구는 크로아티아인이 47%, 세르비아인이 33%였다.[11]

1945년부터 유고슬라비아는 6개의 새로 만들어진 공화국, 즉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로 구성된 연방 사회주의 국가로 통치되었다.[12]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사이의 현재 국경은 1945년 유고슬라비아 연방 정부 위원회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세르비아인이 다수인 지역은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에, 크로아티아인이 다수인 지역은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에 할당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세르비아 소수민족이 후자에 남게 되었다.[13]

1980년 유고슬라비아 지도자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사망한 후, 오랫동안 억압되었던 민족주의가 부활하고, 연방 정부가 약화되면서 각 공화국은 자신의 권위를 더 강력하게 주장하기 시작했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다당제 민주주의와 경제 개혁을 추진했지만, 세르비아의 권위주의적 공산주의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개혁에 반대하며 유고슬라비아 정부의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14] 1990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공산주의 통치를 종식시키고 양국에 친독립 민족주의 정당을 집권시킨 선거를 치렀다. 크로아티아에서는 프라뇨 투지만의 크로아티아 민주 연합 (HDZ)이 권력을 잡았고, 투지만이 대통령이 되었다.[15]

투지만의 프로그램은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소수민족의 많은 구성원들에 의해 반대받았으며, 그는 이들을 노골적으로 적대했다.[15] 밀로셰비치의 지원을 받은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 민주당 (SDS)은 HDZ를 제2차 세계 대전 중 수십만 명의 세르비아인을 학살한 민족주의 파시스트 ''우스타샤'' 운동의 부활이라고 비난했다.[16] 1990년 중반부터 SDS는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 거주 지역에서 무장 반란을 일으키고 세르비아 정부와 세르비아 준군사 조직의 은밀한 지원을 받아 자칭 크라이나 세르비아 자치주를 설립했다. 크로아티아 정부는 공화국의 광대한 지역에 대한 통제력을 빠르게 잃었다.[16] 1991년 2월, 크라이나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고 세르비아와 통합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크로아티아의 다른 세르비아 공동체들도 분리될 것이라고 발표하고 자체 민병대를 설립했다.[17]

1991년 초,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 간의 갈등이 동 슬라보니아로 번졌다. 4월 1일, 부코바르와 동 슬라보니아의 다른 마을 주변의 세르비아인 마을 주민들은 주요 도로에 바리케이드를 세우기 시작했다.[18] 보이슬라브 셰셸이 이끄는 세르비아 민병대인 백색 독수리단이 부코바르 바로 북쪽에 위치한 세르비아인 거주 마을인 보로보 셀로로 이동했다.[19] 1991년 4월 중순, 보로보 셀로 외곽에서 세르비아군 진지에 Armbrust 휴대용 무반동총 3발이 발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국방부 차관이었던 고이코 슈샤크가 공격을 지휘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20] 사상자는 없었지만, 이 공격으로 인해 민족 간의 긴장이 악화되고 심화되었다.[21] 5월 2일, 세르비아 민병대가 보로보 셀로 중심부에서 크로아티아 경찰 버스 2대를 매복 공격하여 경찰 12명이 사망하고 22명이 부상당했다.[18] 세르비아 민병대 1명도 사망했다.[22] 보로보셀로 전투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 나라의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 간에 발생한 최악의 폭력 행위였다.[23] 이 사건은 많은 크로아티아인들을 격분시켰고, 슬라보니아 전역에서 민족 간의 폭력이 급증하는 결과를 낳았다.[24]

얼마 지나지 않아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 부대가 보로보 셀로로 이동했다. 군대의 개입은 지역 크로아티아 지도자들에 의해 환영받았지만, 크로아티아 내무부 차관 밀란 브레작은 JNA가 크로아티아 경찰의 민병대 대응을 방해했다고 비난했다.[25][26] 경쟁 민병대 간의 총격전이 이 지역 전역에서 발생했다.[24] 부코바르에서는 크로아티아인들이 세르비아인 주민들을 괴롭혔고, 때로는 폭력적인 행위도 벌어졌다. 크로아티아 경찰은 지역 라디오 방송국인 라디오 부코바르를 강제로 장악했고, 방송국의 세르비아인들은 해고되고 크로아티아인으로 대체되었다.[27] 세르비아 민병대는 부코바르 주변의 세르비아인이 주로 거주하는 시골 지역의 교통로를 체계적으로 차단했고, 며칠 안에 마을은 크로아티아인이 거주하는 마을을 통과하는 비포장 도로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부코바르의 분위기는 "살벌했다"고 전해진다.[28]

1991년 5월 19일, 크로아티아 정부는 주권 선언에 대한 전국적인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부코바르를 포함한 크로아티아 전역에서 강경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은 세르비아인들에게 국민투표 보이콧을 촉구했고, 온건파는 투표를 통해 독립 반대를 표명할 것을 주장했다. 많은 지역 세르비아인들이 투표에 참여했다.[29] 국민투표는 전국적으로 94%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30]

독립 국민투표 이후 부코바르와 주변 지역의 폭력이 심화되었다. 마을과 주변 마을에서 총격과 폭탄 공격이 반복적으로 보고되었다.[31] 6월부터 도시에 대한 산발적인 포격이 시작되었고, 여름 내내 그 강도가 증가했다. 부코바르의 크로아티아 점령지 북부 교외 지역인 보로보 나셀레는 7월 4일에 심각한 포격을 받았다.[32] 세르비아 민병대는 지방 자치 단체에서 수천 명의 비세르비아인들을 집에서 쫓아냈다.[33] 토미슬라브 메르체프가 이끄는 크로아티아 민병대는 부코바르 안팎에서 세르비아인들을 공격했다(이후 1991년 부코바르 세르비아인 학살로 조사됨). 30명에서 86명의 세르비아인이 실종되거나 사망했으며, 수천 명이 집에서 도망쳤다.[34][35] 부코바르의 크로아티아 정부 대표는 자그레브 당국에 "도시는 다시 한 번 테러, 무력 충돌,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 도발적인 총격전의 희생자가 되었다."고 전했다.[36] 양측의 무장 세력은 이 지역에서 수백 채의 집과 농장을 불태우고 약탈했다.[37]

이 분쟁은 민족적 배경이 약했다. 부코바르에 오랫동안 살고 있던 많은 세르비아인(스타로세디오치, old settlers)은 크닌과 베오그라드에서 지속적으로 나오는 선전을 믿지 않고 크로아티아인과 함께 살아가길 원하며 수 세기간 내려왔다. 하지만 1945년 추방당한 독일인 대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등지에서 들어온 도실라치(došljaci, newcomers)는 민족주의적 선전에 쉽게 반응했다. 기자 파올로 루미츠는 "애국심을 동원해서까지 민족감정을 끌어내려 했으며 실패할 경우에는 그들을 죽이고 재산과 물건을 도둑질하거나 쫓아냈다."라고 말했다.[38] 크로아티아인이 전투가 벌어져 피난을 갈 때 종종 크로아티아 경찰보다도 신뢰할 수 있다 믿은 세르비아계 이웃에게 자신의 집 열쇠를 맡기기도 하였다. 정치과학자 사브리나 P. 라멧은 동슬라보니아의 전쟁은 "도시의 다문화주의에 대항하여 도시의 다문화 생활에 편입되지 않은 사람들을 동원"한 특성이 있다고 말했다.[39] 베오그라드의 전 시장인 보그단 보그단비치는 부코바르의 공격은 도시주의에 대한 고의적 공격인 우비사이드의 측면이 강하다고 말했다.[40]

10. 1. 선전(프로파간다) 활동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언론은 전투의 진행 과정과 그 배경에 대해 치열한 선전전을 벌였다. 양측 선전 기구는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부추기고, 객관성이나 자기비판 없이 상대를 악마화하고 비인간화하는 표현을 사용했다.[380] 크로아티아 언론은 세르비아군을 "세르비아족 테러리스트"나 "세르비아 공산당 점령군"으로 묘사하며, 이들이 천 년 만에 독립을 꿈꾸는 크로아티아를 파괴하려 한다고 주장했다.[380] 부코바르 함락 후, 크로아티아 일간지 노비 리스트는 세르비아를 "식인종"이나 "잔인한 세르비아 극단주의자"라고 비난했다.[381]

반면 세르비아 언론은 유고 인민군과 세르비아군을 세르비아 국민의 "해방자"이자 "수비군"으로 칭하고, 크로아티아군을 "우스타샤같은 군단", "블랙셔츠", "무장 세력", "술에 취한 괴물들"이라고 비난했다. 또한 크로아티아군이 "여성복을 입어 여장하여 탈출"했다거나 "흑인"을 전투원으로 썼다는 등 근거 없는 인종차별 및 젠더 편견을 드러내기도 했다.[381]

희생자의 상태는 양측 선전 기구의 핵심 주장이었으며, 전쟁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데 이용되었다. 익명의 희생자가 크로아티아 언론에서는 크로아티아인으로, 세르비아 언론에서는 세르비아인으로 보도되며 서로 이용되었다. 세르비아계 반정부 성향 신문 '레푸블리카'는 국영 방송국 TV 노비사드가 기자들에게 "세르비아인 시체"로 확인된 것을 촬영하라는 압력이 있었다고 보도했다.[382]

전투 후, 베오그라드 TV는 부코바르 병원 앞에 줄지어 있는 수백 구의 시체를 보여주며, 이들이 크로아티아인에게 학살당한 세르비아인이라고 주장했다. 휴먼 라이츠 워치는 이 시신들이 병원에서 부상으로 사망한 사람들로, 세르비아의 포격으로 인해 매장하지 못하고 방치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세르비아는 부코바르 함락 후에도 "부코바르에서 학살당한 세르비아인"이라는 주장을 계속했다.[383]

이러한 희생자 중심의 선전은 강력한 동기 부여 효과를 낳았다. 한 세르비아인 자원군은 인터뷰에서 전쟁 전에 마을을 가 본 적이 없었으나, "크로아티아인은 세르비아인이라는 이유로 어린이를 고문하고 학살하는 도시 내 학살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전쟁에 참여했다고 말했다.[384] 로이터는 크로아티아 병사가 어린이 41명을 학살했다고 오보를 냈는데, 이 오보는 하루 뒤 정정되었으나 세르비아 언론은 이 보도를 크로아티아에 대한 군사 활동을 정당화하는 데 활용했다.[385] 부코바르 공세에 참여했던 많은 이들은 적대적인 점령군에게서 도시를 해방시키는 투쟁을 해온 것이라고 믿었다.[386]

10. 2. 국제사회의 반응

유럽 공동체(EC)는 전투 종식을 위해 여러 차례 휴전 중재를 시도했으나, 양측은 휴전 합의 후 수 시간 만에 이를 번번이 위반했다. 일부 유럽 공동체 회원국들은 서유럽 연합의 군사 개입을 요구했지만, 영국의 거부권 행사로 무산되었다. 대신 캐링턴 경을 의장으로 하는 유고슬라비아 회담이 구성되어 분쟁 종식 협상을 시도했다.[387]

유엔은 1991년 9월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713호를 통해 유고슬라비아 전역에 무기 금수 조치를 시행했다. 그러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은 무기를 수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이 조치는 분쟁을 제한하는 데 실질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387]

유럽 강대국들은 통일된 유고슬라비아 유지를 위한 노력을 포기하고, 1992년 1월 15일 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의 독립을 승인하기로 결정했다.[387]

국제 감시단은 전투 중 발생한 인권 침해를 막으려 했으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조직적인 방해로 인해 실패했다. 마렉 골딩과 사이러스 밴스 등 유엔 특사들의 방문은 체계적으로 방해받았다. 특히, 부상당한 환자들이 살해당한 병원을 방문하려던 밴스의 요구는 학살 주동자 중 한 명인 베셀린 슐리반차닌 소령에 의해 저지되었다.[388] 슐리반차닌은 TV 카메라에 녹화된 격렬한 대치 상황에서 적십자 대표단의 통과를 막으며 "여기는 내 나라이고, 우리가 정복했다. 여기는 유고슬라비아고, 내가 여기서 지휘관이다!"라고 말했다.[389]

두브로브니크 포위전이나 사라예보 포위전과 달리, 부코바르 전투는 국제 언론의 취재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외국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영국의 저널리스트 미샤 글레니는 유고 인민군,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정부, 그리고 많은 세르비아인들이 외국 언론에 적대적인 반면, 크로아티아인들은 더 개방적이고 우호적이었다고 언급했다.[390]

10. 3. 크로아티아의 반응

크로아티아 언론은 부코바르 전투 초기부터 이 사건에 큰 관심을 보였다. 언론인 시니샤 글라바셰비치는 포위된 마을에서 부코바르의 상황을 생생하게 중계했다. "VukoWAR"와 같은 전쟁 포스터를 포함한 전시 예술 작품들도 많은 주목을 받았다.[391]

크로아티아 정부는 부코바르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글라바셰비치의 방송을 막기 시작했지만, "부코바르는 포격받지만 함락되지 않을 것", "부코바르는 결코 함락되지 않을 것"이라는 선전 구호를 내세웠다.[391] 주요 일간지인 베체르니 리스트와 노비 리스트는 부코바르 함락과 같은 내용을 검열했으며, 함락 이틀 후인 11월 20일에도 부코바르에서 전투가 계속되고 있다는 보도를 내놓았다. 부코바르 함락 소식은 세르비아의 선전일 뿐이라고 일축했다.[392] 그러나 크로아티아 사람들은 서구 외신 위성방송을 통해 유고 인민군 군인과 세르비아 준군사 병력이 마을을 자유롭게 다니며 주민들을 억류하고 있다는 소식을 곧 알게 되었다.[393]

결국 항복 소식을 숨길 수 없게 되자, 양대 일간지는 부코바르 함락이 크로아티아의 용기와 저항을 보여준 것이라며, 크로아티아를 돕지 않고 개입하지 않은 국제 사회를 비난했다.[392]

크로아티아 정부는 전투 과정에서 여러 비판을 받았다.[392] 생존한 수비군과 우파 정치인들은 크로아티아 정부가 국제적 인지도를 확보하기 위해 부코바르를 고의로 희생하고 배신했다고 비난했다. 많은 사람들은 부코바르 함락이 음모론의 일부로 희생된 것이라고 생각했다.[394] 부코바르의 크로아티아군 지휘관인 밀레 데다코비치와 브란코 보르코비치는 전투에서 살아남아 정부의 행동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정부는 이들의 입을 막기 위해 크로아티아 헌병에게 잠시 억류하기도 하였다.[314] 또한, 크로아티아 정부는 일간지 슬로보드니 체드니크에 데다코비치가 군 증원을 간청했으나 대통령 투지만이 이를 회피하는 듯한 전화 녹취록이 실린 것을 검열하였다. 이 녹취록이 폭로되면서 대중이 분노하였고 수비군이 배신당했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395]

군사적 관점에서 부코바르 함락이 크로아티아의 전쟁 수행에 있어서 큰 재앙은 아니었다. 전투로 유고 인민군의 후방이 깨지며 유고 인민군은 완전히 소진되어 더 이상의 진격 작전을 수행할 수 없었다. 부코바르는 3면이 세르비아가 장악한 영토로 둘러싸여 이미 방어가 불가능한 지역이었으며 부코바르에서 자그레브보다는 베오그라드가 더 가까웠다. 부코바르 전투의 패배는 전략적 측면에선 크로아티아군의 사기를 낮췄지만 도시 함락에 비해 유고 인민군이 입은 손실과 시간적 지연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매우 컸다.[314]

전투 이후 부코바르는 크로아티아의 저항과 고통의 상징이 되었다. 전투 생존자, 참전용사, 언론인들은 전투와 그 상징에 대해 수많은 회고록, 노래, 비망록을 작성하며 부코바르를 "경의로움", "자존심", "지옥", "크로아티아의 기사" 등 다양하게 불렀다.[394] 작가들은 "부코바르 원리", "부코바르 영성", "부코바르 윤리" 등을 외치며 수비군 및 마을 사람들이 보여준 자질을 강조하였다.[394] 크로아티아의 참전 용사들은 부코바르라는 이름의 메달을 수여받았다.[396] 1994년, 크로아티아가 자국 화폐인 크로아티아 디나르를 새 화폐인 크로아티아 쿠나로 바꾸면서, 새 20쿠나 지폐에 부코바르에서 파괴된 엘츠 성과 부코바르 근처에 있는, 동슬라보니아의 고대 신석기 유물인 부체돌 도베의 그림을 넣었다. 이 그림은 발행 당시 세르비아 통제 하에 있던 부코바르의 크로아티아 문화를 강조하였다.[397] 1993년과 1994년 부코바르가 크로아티아 영토로 돌아올 때 어떻게 재건할 지에 대해 국가적 논쟁이 있었는데, 일부 사람들은 마을을 전쟁추모비로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396]

크로아티아 민주연합(HDZ)은 부코바르 지역이 크로아티아로 돌아오기 전 수 년간 부코바르와 관련된 대중 문화를 선전에 이용했다.[398] 1997년, 프라뇨 투지만 대통령은 'Sve hrvatske pobjede za Vukovar'(부코바르를 위한 전크로아티아의 승리)라는 이름의 음악 캠페인을 개최하고 동슬라보니아 전역을 순방하였다. 이 캠페인은 크로아티아 레코드의 애국 음악 편집본 발매와 함께 이루어졌다.[399] 1998년 부코바르가 크로아티아 영토로 돌아오면서, 이 회복은 크로아티아 국민 정체성 회복을 위한 오랜 투쟁을 이뤄낸 것으로 축하받았다.[400] 투지만 대통령은 부코바르가 크로아티아 영토로 돌아오면서 재통합 기념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10. 4. 세르비아의 반응

부코바르 전투에 대한 세르비아 내 반응은 크게 엇갈렸다. 유고 인민군, 국영 언론, 극우 민족주의자들은 승리를 환영했다. 유고 인민군은 베오그라드에서 승전 기념 행진을 열었고, 장교들은 "가장 치열하고 힘들었던 우스타샤 요새 함락전"에서 승리한 것을 축하받았다.[401] 세르비아 일간지 폴리티카는 1992년 11월 20일 자 신문 1면에 "부코바르 해방되다"라는 문구를 대문짝만하게 실었다.[389] 극단적 민족주의자인 화가 밀리치 스탄코비치는 1992년 1월 세르비아 정기 간행물 포글레디에 기고한 글에서 "유럽은 부코바르가 크로아티아 나치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주장하며, 크로아티아를 폄하했다.[402]

세르비아 지리학자 요반 일리치는 이 지역을 세르비아에 병합하고 크로아티아인을 추방한 후, 다른 지역의 세르비아인을 이주시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세르비아인 통일을 위해 국경을 다시 그리고, '세르비아 민족주의에 반대하는 크로아티아인'을 "민족적 정신장애자"로 규정하며 치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403] 다른 민족주의 작가는 동슬라보니아가 역사적으로 크로아티아 영역이었음을 인정하면서도, 크로아티아인들이 "가톨릭으로 개종, 통일화되어 크로아티아화"되었다며 "인종청소"를 비난했다. 민족통일주의 선전은 세르비아와의 근접성 및 세르비아인 다수 거주 지역을 강조했다.[403]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지도부도 긍정적이었다. 1991년부터 1995년까지 부코바르는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RSK)이 장악했고, 함락일은 '해방의 날'로 기념되었다. 전투는 크로아티아 침략으로부터 세르비아인의 삶과 재산을 지키기 위한 투쟁으로 묘사되었다. 크로아티아인과 함께 어려움을 겪었던 세르비아인들은 '지하실 사람들'을 뜻하는 포드루마시(podrumaši)라고 모욕당했다. 세르비아인 민간인 사망자는 인정되지 않았고, 부코바르 세르비아 기념 묘지에는 유고 인민군과 함께 싸운 지역민만 묻혔다.[404]

반면, 많은 세르비아인은 전쟁에 반대하고 국가 개입에 저항했다. 유고 인민군이 예비군을 소집하자 부모와 친척들은 막사에 모여 자녀들의 참전을 막았다.[405] 징집 거부 운동은 세르비아 전역에 퍼졌고, 개별 저항부터 수백 명의 단체 저항까지 다양했다. 야당 정치인들도 전쟁에 반대했다. 민주당의 데시미르 토시치는 밀로셰비치를 비난했고, 세르비아 부흥 운동의 부크 드라슈코비치는 병사들에게 "총을 놓고 도망가라"고 했다.[406] 보르바에는 유고슬라비아의 행위를 비판하는 논설이 실렸다.

1991년 12월 말 여론조사에서는 67%가 즉각적인 종전을 원했고, 27%만이 전쟁 지속에 찬성했다. 밀로셰비치와 세르비아 지도부는 징집병 추가 동원이 어렵다고 판단했다. 유고 인민군 이탈이 계속되고 크로아티아군이 강화되면서, 전쟁 지속은 비생산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보스니아 분쟁으로 인해 크로아티아에 묶인 군사 자원을 풀어야 했다.[408]

전투는 공개적으로 승리로 발표되었지만, 유고 인민군에는 큰 영향을 미쳤다. 군 지휘부는 고스피치 같은 강력한 방어 도시 작전 능력을 과대평가했음을 깨달았다. 육군의 "세르비아인화"가 가속화되어 1991년 말에는 90%가 세르비아인이었다. 공산주의 범유고슬라비아 정체성을 버리고, 새 장교들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를 사랑하도록 교육받았다. 패배로 세르비아 정부는 군 통제력을 강화했고, 친밀로셰비치 민족주의자로 지도부가 교체되었다. 벨리코 카디예비치는 "건강상 이유로" 강제 퇴역했고, 1992년에는 장교 38명이 무능력과 반역죄로 재판받았다.[409]

참전 병사들은 민병대 행동에 반발했다. 밀로라드 부치치는 "그들은 그런 이유로 죽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잔학 행위는 일부에게 트라우마와 죄의식을 안겼다. 한 참전용사는 아샤르크 알아우사트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11. 점령, 복원 및 재건

부코바르는 전투로 인해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크로아티아는 공식적으로 부코바르 주택의 90%가 파괴되거나 피해를 입었으며,[332] 그 수는 총 15,000채에 달한다고 집계했다.[413] 정부는 재건 비용을 25억달러 (25억)로 책정했다.[414] 도시는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이 통제하는 7년간 간신히 복구하였다.[415]

1995년 에르두트 협정 체결 후, 크로아티아 난민의 귀환과 크로아티아로의 재통합을 위해 유엔 동슬라보니아, 바라냐 및 서시르미움 잠정통치기구(UNTAES)를 수립하였다. 유엔 평화유지군은 1996년부터 1998년까지 과도기 동안 지역 안보를 맡았다.[302] 1999년이 되어서야 크로아티아인들이 부코바르로 돌아오기 시작했으며, 전쟁 전에 살았던 주민 대다수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2001년 3월 기준, 부코바르 지역의 거주민은 전쟁 이전보다 훨씬 낮은 31,670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 중 57.46%인 18,199명이 크로아티아인이고 32.88%인 10,412명이 세르비아인이다. 마을 공동체는 전쟁 이전 민족 혼합적인 성격으로 돌아가지 못했으며,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은 서로 분리된 생활을 하게 되었다. 상점, 카페, 레스토랑, 스포츠 클럽, 학교, 비정부 기구, 라디오 방송국과 같은 공공시설은 각 공동체마다 별도의 시설로 서로 분리되어 생성, 재설정되었다.[394]

크로아티아 정부는 부코바르 및 인근 지역의 부흥 운동을 지원했으나, 세르비아인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은 2003년까지도 대부분 폐허였다. 크로아티아인과 세르비아인 양측 모두 세르비아인 지역을 '처벌'하기 위해 정부가 고의적으로 재건을 지연했다고 믿었다.[302] 휴먼 라이츠 워치는 부코바르 지역에서 4천 채가 재건되었으나 이 중 세르비아인이 거주한 집은 하나도 없다고 발표했다.[422] 또한 도시의 주요 산업시설이 파괴되어 실업률도 높았으며 주민들은 집을 팔 수가 없었다.[423] 부코바르 내 대부분의 주택과 역사적인 건축물은 2011년 들어서면서 거의 다 재건되었다.[424]

12. 기념관 및 추모

부코바르 곳곳에는 전투의 흔적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많은 건물 벽에는 총알 자국과 포탄 파편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다. 특히 부코바르 급수탑은 심하게 파괴된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전투를 기억하는 상징물이 되었다. 마을 안에 있는 부코바르 병원은 전투 당시의 모습을 재현하여 전시하고 있으며, 오브차라 학살 현장에는 대량 학살과 잔혹 행위를 보여주는 전시관이 설치되어 있다.[425]

매년 11월, 부코바르 시는 마을 함락을 추모하는 4일간의 축제를 연다. 11월 18일에는 '기억의 행진'이 열리는데, 이 행진은 도시에서 추방당한 크로아티아인들을 추모하기 위해 부코바르 병원에서 5km 떨어진 크로아티아 조국전쟁 피해추모비까지 걷는 행사이다. 크로아티아 전역에서 수만 명이 이 행진에 참여한다.[426]

부코바르에 살고 있는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인들의 기념 행사에 참여하지 않거나, 아예 도시를 떠나거나 실내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다. 2003년까지는 11월 17일에 세르비아군 묘비 앞에서 별도의 추모식을 가졌으나,[428] 이후에는 11월 18일에 추모 행사를 연다.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인들이 사용하는 용어를 피하고, 단순히 '11월 18일'이라고만 부른다.[427]

세르비아인 사망자 추모 문제는 더 큰 갈등을 야기했다. 유고 인민군과 함께 싸우다 사망한 지역 세르비아인들은 크로아티아인들의 집이 있던 자리에 매장되었는데,[428] 원래 묘비에는 세르비아 군모인 샤카차 모양의 조각이 있었다. 부코바르가 크로아티아로 돌아온 후, 이 묘비들은 지속적으로 피해를 입었고, 결국 세르비아인 공동체는 군사적 의미가 없는 중립적인 묘비로 교체했다.[429]

부코바르의 세르비아인들은 전쟁 기념비와 같은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와 관련된 장소에서 소외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크로아티아인 사회학자 크루노 카르도브는 부카 강이 다뉴브 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에 있는 거대한 석재 십자가상을 예로 들며, 세르비아인들이 이곳을 거의 찾지 않고, 가더라도 큰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설명했다. 한 세르비아인 소년은 십자가에 무엇이 쓰여 있는지 알고 싶었지만, 너무 무서워서 비문을 읽지 못했다고 한다. 카르도브는 "부코바르는 보이지 않는 경계선이 세워져 있으며... 이 선은 특정 그룹에게만 지적 지도에 새겨진 것이 보인다"고 말했다.[430]

1998년에서 2000년 사이 세워진 조국전쟁 피해자 추모 묘지. 938개의 대리석 십자가가 세워져 있다.


부코바르 전투는 크로아티아 전역에서 추모되고 있다. 거의 모든 크로아티아 도시에는 '부코바르 거리'가 있다.[396] 2009년에는 크로아티아 해군이 새로 도입한 헬싱키급 미사일 고속정의 최선두 함정에 부코바르라는 이름을 붙였다.[431] 크로아티아 의회는 11월 18일을 "1991년 부코바르 희생 현충일"로 지정하여 부코바르를 지킨 모든 사람들을 추모하고 있다.[396]

부코바르는 크로아티아의 민족 정체성을 상징하는 장소로, 크로아티아 전역에서 사람들이 찾아오는 순례지가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새해 전날 부코바르의 주요 기념 십자가 앞에 모여 한 해를 마무리하기도 하지만, 일부 지역 주민들은 "기뻐할 감정을 느낄 만한 장소가 아니다"라고 비판하기도 한다.[428] 카르도브는 부코바르가 "순수한 크로아티아 정체성이 구체화"된 곳이며 "크로아티아 국가의 근본 신화"가 되었다고 말한다. 즉, 부코바르는 크로아티아의 민족 감정과 상징주의가 모인 진정한 장소인 "상상의 장소"가 되었다는 것이다. 카르도브는 부코바르가 결국 "모든 국민을 위한 단 한 곳"이 될 수 있을지는 의문스럽다고 결론짓는다.[432]

2010년 11월, 보리스 타디치 세르비아 대통령은 오브차라 학살 현장을 방문하여 유고슬라비아 전쟁 기간 동안 있었던 크로아티아인에 대한 학살에 대해 "사죄와 반성"을 표명하며, 부코바르를 방문한 최초의 세르비아 대통령이 되었다.[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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